「보이는 어둠」 윌리엄 스타이런(1990)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으며 원인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작가가 직접 우울증에 걸렸었고 싸워 이겨나가며 겪은 일들을 토대로 작성한 글입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내 소설들을 다시 읽어보면서(모든 여주인공이 파멸의 운명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젊은 여성들의 우울한 심경을 어쩜 그리고 정확히 그려낼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내게 찾아온 우울증은 결코 낯설지 않았고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도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어떤 치료 효과도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마지막 폭풍우를 통과할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만약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격력했던 폭풍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약해진 후 사라질 것이다. 알 수 없이 찾아왔듯 알 수 없는 모습으로 고통은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 1925~2006), 소설가
미국 버지니아주 뉴포트뉴스에서 태어난 스타이런은 학창 시절 교지에 여러 단편소설을 싣는 등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듀크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미국 해병대 입대 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중위로 2년간 복무했다. 이 후 뉴욕의 맥그로힐 출판사 판매부에서 일하며, '뉴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했다. 1950년대 초반 파리에서 전설적인 문학잡지 '파리 리뷰'의 창간을 도왔다.
대표적인 소설책으로는 어느 젊은 여성의 자포자기적 몰락을 그린 첫 소설 '어둠 속에 눕다'(1951)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학술원에서의 로마대상을 수상했다. 이 외 퓰리처 수상작인 '냇 터너의 고백'(1967), 베스트셀러이자 영화로 만들어진 '소피의 선택' 등이 있다.
'보이는 어둠'이라는 책은 '치노 델 뒤카 세계상'이라는 인본주의에 위대한 공헌을 한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1985년 12월 파리를 방문한 윌리엄 스타이런은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상을 수상하러 갔지만, 어쩐 일인지 시상식과 축하 만찬 등이 괴롭기만 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상황은 증세를 더욱 악화시켰고, 억지 미소도 어려웠다. '보이는 어둠'은 이때의 본인이 직접 우울증과 싸운 경험을 그린 명작이다. 원래는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잡지에 강연록 형식으로 소개한 것인데, 뛰어난 문학성 덕분에 우울증을 다룬 수많은 책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책이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증상 - 우울증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일상적인 '기분이 우울하다'나 주기적으로 침울해지는 현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렇듯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특징이 우울증을 베일 속에 감추게 했다. 스타이런은 우울증을 익사나 질식에 비유하며, 이것이 그 느낌을 가장 가깝게 표현한 것이지만 이마저 정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스타이런이 정리한 우울증의 몇 가지 특징은, 심한 자기혐오 / 자살 충동 / 불면증 / 혼란, 집중 불능, 기억력 쇠퇴 / 심기증(정신의 병을 인지하지 못한 채 어딘가 몸이 아프다고 생각하며 두려워 하는 상태) / 성욕과 식욕 감퇴 이다.
대부분 우울증 환자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저하됬다가 점점 나아지는 데 반해, 스타이런은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다가 오후 무렵부터 점점 참을 수 없는 감정과 생각에 우울증 증세가 심해졌다고 한다. 또한 생체리듬에 따라 증세가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를 잃어버리는 '속수무책 마비'도 그가 언급한 우울증의 한 증상이다.
극단적인 경우, 우울증은 말 그대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신경전달물질과 관련 있는 스트레스는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이라는 뇌 화학물질을 감소시키고, 코르티솔 호르몬을 증가시킨다. 이러한 호르몬 불균형은 우리의 기분을 심하게 짓누르는 발작적 기관 역할을 한다.
자살에 대한 오해
'보이는 어둠'에서는 스타이런이 알고 지낸 사람들 중 우울증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중에서 뛰어난 작가이자 전직 외교관으로, 미식가이자 호색가였던 친구 로랭 가리가 자기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한 사건을 인상적으로 언급한다. 그런 사람도 자기 삶에서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가치를 느낀단 말인가!
자살한 사람의 가족은 자기 아들, 아내의 자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살을 금기시하는 이유에는 자살자가 일을 쉽게 해결하려는 겁쟁이라는 인식도 있다. 그러나 자살자들이 극한적인 선택을 하는 까닭은 단지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체적 고통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보다 정신적 고통으로 자살하는 사람을 더 용서하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스타이런은 그들을 "말기 암 환자가 죽음을 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고 말한다.
예술가적 유형의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고, 자살 비율도 높다고 지적한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마크 로스코,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하트 크레인,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 등이 모두 자살한 예술가이다. 동료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자살을 맹비난 한 디미르 마야코프스키는 몇 년 뒤 똑같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살한 사람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살한 사람의 심정을 감히 느낄 수 없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공통된 원인은 상실감
우울증 치료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뚜렷한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원인이 된다기 보다 그것이 잠재돼 있던 우울증을 발현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스타이런의 경우,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끊자, 불안감을 억누르던 방어벽이 사라지면서 그동안 마취돼 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나왔다. 첫 신호로 어제까지도 즐거웠던 일이 갑자기 시들해졌고, 애견과의 산책도 휴가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변했으며, 끊임없이 쏟아지는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했다.
스타이런은 모든 우울증에는 한 가지 공통된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거나, 혼자 남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감이 그것이다. 스타이런도 열세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어린 나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깊은 상실감을 경험했다. '보이는 어둠'에서 자신의 우울증은 내재해왔던 깊고 영속적인 두려움을 겉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 순간, 자신의 소설에 우울증과 자살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 찾아온 우울증은 결코 낯설지 않았꼬,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도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우울증을 겼었고, 스타이런은 유전적 기질과 어릴 적 어머니의 죽음, 타고난 예술적 기질 등이 우울증을 유발한 대표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해결책
이미 우울증이 많이 진행된 사람에게는 정신과 치료, 약물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울증의 확실한 원인 역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스타이런의 우울증은 치료효과를 못보다가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다음에야 해결될 기미를 보였다. 병원의 안정되고 규칙적인 생활이 그의 삶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의 진정한 치료자는 은둔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깨달은 사실은,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우울증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폭풍우처럼 언젠가는 사그라진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거기서 벗어나는 날이 틀림없이 온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보면, 인간은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대부분 사람은 비교적 깊은 상처 없이 폭풍우의 반대편으로 나온다. 그 비바람을 뚫고 나온 사람에게는 유난히 밝고 따뜻한 태양이 기다리고 있다.
스타이런은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우울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울증이 자아감과 관련된 질병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울증 치료가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울증은 뇌 화학물질의 불균형이나 부정적인 내면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정신 또한 총체적인 자아감과 관련된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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